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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세상

인재를 기르고 선발하고 맡겨라 407 로 8 | 혐의를 받고 있는 조말생을 함길도 감사로 보내려는 것에 대한 사헌부의 반발을 받고 세종이 한 말입니다.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재량권을 적절히 발휘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습니다. 법은 융통성(權과 원칙 중에서 그 어떤 한 가지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세종실록》 25/10/12 좌정언 윤면이 김후의 본직 환임의 불가함과 3, 4품인 수령을 경관의 예에 의해 서경할 것을 건의하자 세종이 왕의 재량권을 강조하면서 한 말입니다. 인정人情이 잃었던 직임任을 그대로 다시 주면 전의 허물을 면하려고 하여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직임을 갈지 않는것이다. 《세종실록 17/06/17 오랑캐의 습격을 고하지 않은 ..

제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법을 시행하려고 할진대, 모름지기 금석같이 굳어야 하고 분분히 변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若欲行法須堅如金石勿令紛更可也, - 《세종실록》 12/08/13 - 380 세종처럼 신뢰 주는 법과 제도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信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세종실 록》 07/04/14 화폐정책의 변화와 관련해 정부의 신의 있는 태도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한 말입니다. 이미 법을 세웠으니 어찌 반드시 다시 명을 내린 후에야 검찰하리오. 자주 명령을 내리면 도리어 명령이 가볍게 생각되리니, 경이 검찰하되좇지 않는 자가 있거든 아뢰고 의논하라.《세종실록 02/01/11 김점이 창고 관리들이 마음을 쓰지 않아서, 여러 해 동안 이미 쓴 물건을 아직껏 중 기重記에 올리지 ..

제1계명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為人君者聞民且死尚徵租稅誠所不忍, - 《세종실록》 01/01/06 - 372 세종처럼 왕의 역할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하물며 지금 묵은 곡식이 이미다 떨어졌다고 하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준다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오히려 굶은 백성에게 조세를 부담시켜서 되겠는가. 더욱이 감찰(어시)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해주지 않는다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세종실록》 01/01/06 세종은 여기서 국왕이 해야 ..

그는 자신의 직책을 완수하기 위해 매일 새벽이면 옷을 입고, 닐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는 등 평생을 “한 번도 게으르지 않게” 실았습니다.(세종실록》 32/02/17 그 결과 “비로소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지고 인구가 많아졌으며”(율곡전서》(동호문답 사람들은 각자 맡은 바일을 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 부부 간 우애하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왕과 주요업적 代왕명 재위기간 주요 업적 휘는 성계, 고려 말 무신으로 왜구토벌의 공적을 세 1태조 [1392~1398 |움.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함. 휘는 방과, 즉위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 2 정종 1398~1400 고 상왕이 됨. 휘는 방원, 조선 건국의 1등공신임왕자들의 ..

세종은 여자 환자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는 것을 꺼러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녀제도를 확장했습니다. 세종시대이 의료조건에 대해서는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산시킨 것과, 의학서적을 편찬하고 국산 약재(鄕藥]를 개발한 것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재위 5년에 나이 어린 지방의 관비官婢 중에서 현명한 자를 뽑아 중앙에서 교육하고 다시 본고장으로 내려 보내게 했습니다. 이 제안을 한 허도에 따르면, 사람은 “그 위급할 때를 당하면 비록 종실의 처자處子라 할지라도 의원을 구하여 치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드디어 남자 의사(男醫]로 하여금 살을 주무르게 하니, 그 남녀의 분별을 삼가는 뜻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 “진찰해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끝내 질병을 다스리지 못하고서 요..

정남일구定南日零정남일구는 세종 19년(1437년)에 제작한 해시계의 하나로 지남침이 없이도 남쪽 방향을 결정하여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기기이다. 남북 기둥을 잇는 사유환四游環축은 지구 자전축인 하늘의 북극방향과 일치하고 동서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축 끝에 추를 달아 정남일구의 수평을 잡도록 하였다. 지평환地平環에는 24방위와 24절기가 표시되어 있으며, 사유환 양 측면에 눈금이 새겨져 있어 정오에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할 수 있다. 사유환 안쪽에는 직거直距와 남북방향으로 움직이는 규형衡이 있어서 일 년 동안의 24절기와 해가 떠서질 때까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다. 풍기대風旗臺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깃발, 즉 풍향기를 세우는 대臺이다. 세종시대에는 농업기상학이 발달하여 기상관측이..

마음경영 가까 이는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멀리는 국민들의 마음을 감음시키는 것이 정치 세종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정치라고 하겠습니다. 가까이는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혼신을 다해 국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밖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감읍시켰고, 멀리는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동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장에서는 세종의 언행을 통해서 그 비결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샀습니다. 그는 경연 등 어전회의에서 왕의 말을 최소화함으로써 신하들로 하여금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했습니다. 허조가 임종 시에 “우리 임금은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셨다.”..

"우리가 우환을 없앴으니 굳이 거명할 필요가 없다.” 1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명나라의 가도, “정왜가도”를 방지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역사 연구에서 잘 안 다뤄 있지만 《태종실록》 13년 3월 20일자를 보면 중국의 사신이 와서 명나라 영락제가 일본국 노왕이 “지성으로 사대했는데 지금 새로 계승교 왕이 도둑질을 금치 못해서 우리 강토를 침략하고 아비의 영정)만 책을 빼서 토벌을 하고자 한다. 너희들도 알아라. 준비하라.”고 말 영도비전 323법에 걸어놓고 그 눈을 찌른다니 이 부도함이 이와 같다. 짐이 병선 그래서 황제가 2월 16일 이미 상당히 동진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 11월 20일에 내려온다는 소식도 전해집니다. 임금이 굉장히 놀랍니 큰일났다. 어찌 황제가 실없는 말..

사민정책 다음으로, 세종시대 북방사민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종은 재위 후반기에 3200호의 26,000여 명을 이주시켰습니다. 2명 이상이 한호를 이루어 떠났습니다. 원래 주민의 이주는 세종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리고 황희는 한꺼번에 다 가는 게 아니라 1단계와 2단계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어려움은 아전의 농간이었습니다. 아전들이 지방의 호족들과 짜고 힘없는 잔호만을 뽑아 그쪽으로 보내는 겁니다. 뇌물을 줄 수 없는 힘없는 백성만이 뽑혀서 북쪽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게 첫 번째 어려움이었죠. 그러다 보니 저항하는 백성들이 속출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자신의 팔을 잘라서 안 가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예 국경을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왔죠. ..

한마디로 김종서의 어머니까지 감동시키는 배려의 정치를 한 것이 죠 뿐만 아니라 세종은 김종서의 아내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충청도 관찰사에게 정성껏 보살피라고 지시합니다.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의 아내가 지금 공주公州에 살면서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니, 어육魚肉의 종류는 다소를 논하지 말고 연속하여 주어 섭양하게 하 라《세종실록》 21/02/11 한마디로 김종서에게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고 네가 맡은 북방영토경영에만 전념하라고 한 것이죠. 참고로 세종이 생각하는 김종서의 장 점은 이렇습니다.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있으며, 일찍이 측근의 관직에 있어 내 뜻을 자세히 알아서 중대한 임무를 맡을 만했다. 일찍이 명하여 도관찰사로 삼았다가 또 도절제사로 옮겼는데, 북방에 오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