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
위대한선택 본문
조 등 조정의 모든 신료들에게 잘못된 정부정책을 모조리 말하게 하는구언永言의 지시를 내렸고, 들어온 진언을 육조에 내려 의논해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태종의 정치교육은 세종에게 그대로 전수되었고 세종은 재위 기간 내내 구언교지를 내리곤 했습니다.
세종 - 중국과 조선은 다르다."원효대사 - 중국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느냐!"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세자 충녕으로 하여금 명나라 황제를 만나게 하려 한 일입니다. 태종은 양녕이 영락제를 만나고 왔던 일과, 자신이 중국에 다녀왔던 일을 상기하며, 세자로 하여금 중국 여행을 다녀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북방지역이 소란해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점과, 하루라도 빨리 충녕대군을 중심으로 새 질서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태종의 의지가 굳어지면서, 날짜까지 정해진 “조현朝見: 황제를 만남
계획애초 8월 6일 예정, 나중에 18일로 수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왕위계승전위)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은 원효대사의 경우를 생각나게 합니다. 중국에 다녀와 국제적 감각을 익힌 의상대사와 달리, 원효대사는 중간에 중국행을 포기했
든 국사가 의성부에 집중됨으로써 그 권한이 강대하여 14년에는 의정부의 기구를 대폭 축소, 그직무를 조에 나누어주고 소관 사무를 왕에게 시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의정부는 원로,대신이 외교문서나 검토하고 사형수를 다시 심사하는 실권 없는 명목상의 최고행정기관이 되었다. 1430년(세종 18년)에 이르러 의정부 서사 제도를 나시 실시하게 되면시 의정부 직제를 개면 강화하였다. 그러나 1455년(세조 1년) 세조는 형조의 사형수 복심番을 제외한 (조의 보는 공석인 일은 의성부를 기치시 않고 바로 계발할 것을 명함으로써 의정부 시사는 다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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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중국에 다녀온 양녕과 달리 충녕은 가려다가 말았습니다. 미게도 원효대사가 “중국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느냐."면서적인 한국사상사의 길을 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종은 “중국과 조은 다르다.”면서 문자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백성의 원망은 모두 내가 듣겠다. 세자에게는 한줌 흙의 공사라도 하지 않게 하라.
태종의 왕위 승계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간 밀려 있던 공시들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한 다음의 말입니다.
"토목 공사는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는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일이다. 이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내가 다 감당하겠다. 세자가 즉한 다음에는 한줌 흙이나 한 조각 나무의 공사라도 하지 않게 하여 민트얻게 하겠다.”(태종실록》 18/07/05
바로 이 같은 태종의 위대한 선택과 길 닦기 과정에서 위대한 세중시대로 가는 초석이 마련되었습니다.
왕의 조건 85
동생 세종보다. 장수한 양녕대군 아버지 영조보다 먼저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조선 전기의 양녕대군과 조선 후기의 사도세자는 아주 재미있는 비교가 됩니다. 양녕과 사도세자 둘 다 세자였다가 폐위되었는데, 양녕은 온전히 제 수명을 누렸습니다. 동생인 세종보다도 더 오래 살다가 세조 때에 죽지요. 그런데 사도세자는 중간에 자기 아버지인 영조에게 죽임
을 당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왕의 중요한 자격요건에서 사도세자는 결격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조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현재 임금과 앞 임금의 계승관계입니다. 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첫 번째로 한 말도 앞 임금의 정치를 계승하겠다는 것입니다. 태조와 태종께서 쌓아놓은 업적을 계승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매번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앞 시대 대통령의 업적을 전부 부정하면서 시작하는데, 이건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역사에서 축적 없는 발전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처럼 앞 시대를 전면 부정하진 않을 겁니다.
사도세자가 죽게 된 원인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와 정면으로 맞서게 됩니다. 사도세자(그의 사후 영조가 붙여준 시호)는 1749년(영조 25년)부터 대리청정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영조는
* 대리정정 국왕이 어려서 즉위하거나 병 또는 그 밖의 사정이 생겼을 때 국왕을 대리해서 국가의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 섭성의 한 방식이다. 왕세자에 의한 섭정은 대리청정이라 하고,86 세종처럼
일상서무를 세자에게 맡겨놓고 균역법(1750년)과 같은 개혁과제를 주긴합니다. 이것은 마치 세종대왕이 재위 18년 이후부터 의정부나 세자에게 일상적인 업무를 맡겨놓고 훈민정음이나 세제개혁에 집중하게 되는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도 수상 내지 총리가 일상 업무를 담당하고, 대통령은 통일문제나 경제 및 외교 등 중대 사안을 나누어 맡이면 보다 효율적인 정치가 이뤄지지 않을까요.
영조 몰래 떠난 평안도 여행쿠데타 혐의 받기에 충분했던 사도세자
아무튼 사도세자는 자신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면서 소론 인사들을 중용합니다. 대리청정 3년째인 1752년에 소론의 이종성을 영의정에 임명한 것이 그 예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는 영조 몰래 평안도에 갔다옵니다. 박광용 교수에 따르면 사도세자의 평안도 여행은 “영조를 몰아내는 군사쿠데타 기도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당시 평안도는 조선의 변방을 지키는 정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평
대비大妃 등 여자의 경우는 수렴청정, 신하가 하는 경우는 섭정승이라 하였다.
소론조선 후기 서인에서 분파되어 노론과 함께 성립된 정파, 서인 내부에서 정치적 입장의 분화는이미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 여부를 둘러싼 논쟁 등에서 나타나며, 17세기 말엽 죽는기에 정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지도자인 송시열과 그 제자 윤중 스의 불화를 배경으로 남구만·박세제 등이 중심이었으며, 송시열을 정점으로 한 노론나 대였다. 특히 경종 대에는 왕위 계승문제를 직접적 정치 생섬으로 하여, 국왕의 동생 연잉 영을 후원한 노론을 반역으로 규성하여 숙청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한 뒤반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세거되었으며, 그 중 일부가 남인과 연계하여 무력으로 봉이만두난)하다 신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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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곡식은 중앙정부로 수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가 평소 무예에 뛰어나고 병법에도 밝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그럴 혐의가 있다고 간주된 것입니다.(영조와 정조의 나라》, 1998 실제로 인조가 반정을 할 때 든든한 무력 기반을 제공한 곳도 평안도
병력이었고, 가까이는 영조 4년에 이인좌 등의 난이 실패한 원인도 평
안병사 이사성이 애초의 계획과 달리 병력출동을 미루었기 때문이었습
니다.
게다가 영조는 당시 조정이 아버지당과 아들당으로 나뉘었다고 하면서, 만약 사도세자가 병권을 장악하게 되면 완전히 정권이 바뀔 뿐 아니라 근본적인 혁명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입니다.
성색에 빠진 양녕 이제 대신 책 좋아하고 정치를 아는 충녕 이도를 세자로
어쨌든 양녕은 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이 그 자리를 잇습니다. 태종은 1418년 6월 3일 이렇게 말합니다.
"백관들이 양 이세기 잘못이 많다 하여 글을 올려 폐하길 정함에 그의
받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하러 한다."
태종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직장자 원칙에 따라 양녕의 장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