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
태종이 본 세종 본문
태종의 위대한 선택 6)
총애하던 넷째 아들 성녕은 사망하고왕세자인 받아들 양념은 반항하다.
여기에서는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의 여러 가지 조치 가운데서,
'일생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성공적인 왕위계승 작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약 태종이 충녕대군을 포함하여 왕자들을 보호하지 않았거나, 마지막에 세자를 교체하지 않았다면 아마 위대한 '세종 치세는 없었을것입니다. 사실 태종 재위 말년인 1417년까지만 해도 아무도 충녕대군이 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태종과 양녕대군 사이에 갈등이 있지만, 양녕이 점차 철이 들면 좋아지거나, 태종이 죽은뒤 양녕대군에게 어쩔 수 없이 왕위가 승계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그 당시 가장 정보에 빨랐던 황희조차도 양녕대군 쪽에 줄을 대
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다음 해에 들어 성녕대군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태종이정치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세자 양녕이 반항하는 사건으로 세자 양녕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되는데(5월), 그 즈음에야 충녕대군으로의 왕위계승이 점쳐지기 시작했습니다.
* 성녕대군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문무를 겸비했으므로 태종과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니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양녕의 반항태종이 주색에 빠져 있던 양녕대군을 야난치려고 그의 시녀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전하의 시너는 되고 왜 나의 가이(어리)는 내보내려고 하시느냐.”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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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이자 처남인 민무구 형제 태평성대를 만들어갈 세종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태종에게 가장 큰 고비는 민무구 형제의 왕자 제거 음모'였습니다. 세종 7년째인 1407년에 있었던 태종과 민무구의 대화를 먼저 보겠습니다.
태종: “그러면 임금은 장자 외에 다른 아들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냐?"민무구: “그렇습니다. 세자가 아닌 다른 왕자들 중에 똑똑한 자가 있으면 난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민무구의 너무나도 당돌한 이 대답을 듣고 섬뜩한陳然]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방석)를 끼고 국가를 좌지우지하려던"정도전 일파가 제거된 것이 불과 20여 년 전인데, 지금 자신의 동지이자 처남인 민씨 형제가 그와 똑같은 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민무구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세자가 여러 아우들과 더불어
집을 죽 늘어세우고 우애롭게 사는 것을 보고 싶다."
* 민무구 형제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의 동생이지 세종의 외 들로 빈부질, 민무구를 비롯하여 4형제이다. 13985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1등 공신들이다. 그러나 태종의 왕위 승계 문제와 연관해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모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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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식 세대에서는 제발 골육상쟁의 비극이 없었으면 하는 게 태종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종의 마음을 분질러버
리듯이 민무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자 본인은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옆에서 부추기고 피는 자가 있을 것입
니다. 마땅히 나무의 곁가지를 쳐내듯 왕자들을 모두 없애버리셔야
滅 합니다.”
본가지를 두고 결가지를 쳐내듯이 다른 왕자들을 없애버리셔야…
1407년의 어느 여름날 안국동에서 나눈 이 대화에서 태종이 깨달은 것은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지 않는 한 제3, 제4의 왕자의 난'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약한 임금을 끼고 정권을 농단하려는 자는 도처에 깔려 있었습니다. “집안끼리 무리를 짓고 붕당을 모아서 권세를 농단하려는 권신權臣의 출현”은 고려 말 이래 계속되는 정치의 고질병이기도 했죠. 태종으로의 전위傳位(왕위를 물려줌) 소식을 들은 태조가 “그는 강명한 임금이니 권세가 반드시 아래로 옮기지 않을 것”이라는 긍
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왕권의 강화와 순조로운 왕위계승, 그리고 이를 통한 안정된 수성기로의 진입, 이것은 태종이 달성해야 할 지상과제였습니다. 실제로 태종이 즉위했을 때 조선왕조는 아직 창업기의 불안정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변남룡 부자는 “자연재해가 자주ㅡ
일어나는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이 왕조가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약 태상왕(이성계)을 끼고 나오면 누가 감히 당하겠는가.”라는 말을
고려 말 무기력한 국왕의 출현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은 태종은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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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태조 7년) 8월에 일어났고, 제2차 왕자의 난은 1400년(정종 2년) 1월에 일어났다. 태조는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 방우·방과(정종) · 방원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둘째 부인인 강씨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을 두었다. 태조는 후계승계 과정에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총애하던 강씨 소생의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한씨 소생 왕자들은 이를 못마땅해했고, 특히 정몽주를 비롯한 개국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조선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더구나 정도전 · 남은 등이 유신亞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왕실 권력의 기반인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하자 방원은 다른 왕자들과 함께 1398년(무인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 남은 등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었는데 이가 곧 정종이다. 그러나 정종의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휩싸였다. 이때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개국공신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후 지위가 확고해진 방원은 1400년(정종 2년) 마침내 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해서 처형되기도 했습니다.